용마클로즈업 - 강만수(18회) 전 기획재정부 장관
“역사는 용기 갖고 행동하는 사람이 쓰는 삶의 기록”
행정공무원은 국민의 대위권(代位權) 지위를 국민들로부터 부여받는다. 따라서 그들은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립, 윤택한 삶을 보장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곁들인다. 특히 현대사회에서 행정이 미치지 않는 영역은 거의 없다. 그만큼 행정력은 막강하다. 한 산업체를 일구려면 조직과 예산이 수반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론 산업체 발전을 기약할 수 없다. 정책 수립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그래서 정책 수립이 중요하다. 이에 용마회보는 40여년 공직 생활을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한 정책 수립에 혼신의 힘을 다했던 강만수(18회) 동문과 서면 인터뷰를 통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강만수(18회) 동문은 “시대의 아픔을 겪으며 가진 것을 모두 빼
앗겼지만 공직자의 숙명을 짊어지고 여생을 조국을 위해 봉사
하는 마음으로 살겠다 ”고 말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북콘서트에 앞서 축사를 하고 있다.
임우근(19회) 고문과 함께 참가한 동문들
△ 경제가 어려운 시기에 책을 출간했습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기획재정부에 출입했던 기자들이 지금 경제가 어려운데 후진들에게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잘했다는 위기 극복의 경험을 공유하는 게 좋겠다는 권유에 따른 것입니다. 공직자가 공직에서 얻은 경험은 세금으로 얻은 공공재이기 때문에 후진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맞다고 했습니다. 외국에는 백서와 회고록 문화가 잘 정착되어 있으나 우리는 백서를 제대로 남기지 않고 회고록 문화는 정치인이 자기 중심으로 기록해 가치가 떨어진다고들 합니다. 내용은 오래전 2005년에 출간한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과 2015년에 출간한 ‘현장에서 본 경제 위기 대응실록’ 두 권을 합쳐서 일부 업데이트하고 보완하여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도전실록’을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부제에서 나타낸 대로 ‘부가가치세와 금융실명제에서 아시아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1970년 경주세무서 총무과장으로 출발하여 2008년 기획재정부 장관이 되어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응할 때까지 경험했던 주요 정책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다수 국민이 반대했던 부가가치세와 금융실명제 담당 과장으로서 고뇌와 분투, 그리고 차관 때 IMF 외환위기, 장관 때 글로벌 위기와 맞서 싸운 실록은 역사의 주요 부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 장관 시절 부자 감세로 비판을 많이 받았습니다.
감세와 함께 고환율도 비판받았지요. 경제학자 118인이 국회 앞에서 정책을 비판하며 퇴진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
로 2009년 모두가 마이너스 성장을 할 때 OECD 국가가 평균 –3.5% 성장을 할 때 우리만 플러스 0.3% 성장해 해외에서는 우리에게 “서울 관료들에게 경의를” “한국의 위기 대응은 교과서적 사례”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2010년 세계 수
출 12위에서 5계단을 뛰어 7위에 올랐습니다. 감세와 고환율 정책의 결과였습니다. 이런 결과에 대해 퇴진을 요구했던 그 118명의 경제학자는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일본 경제학자 다케우치 야스오는 “질투는 때때로 정의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10억 엔을 번 부자에게 9억 엔의 세금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왜곡된 정의는 질투의 산물이고, 질투의 산물은 능력 있는 사람과 경제 활력의 해외 유출을 초래하고 결국 남아 있는 가난한 사람이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하는 어리석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했습니다. 서울 백화점에서 명품을 사는 것보다 비행기를 타고 도쿄 백화점에 가서 명품을 사 오는 것이 더 싸고, 부산 근교에서
동창회 골프 월례회를 하는 것보다 오이타에 가서 골프 치는 것이 더 싸게 치이는 환율을 실제 경제 사정에 맞게 실세화하는 것을 두고 고환율 정책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때 위기와 싸우는 것보다 환율과 대외 부채에서 우리보다 자유로운 미국 경제학과 싸우는 것이 더 힘들었고, 한국은행의 엇박자를 조정하는 것이 더 힘들었습니다.
△ 40년 공직 생활 중 가장 뿌듯했던 때는 언제입니까.
스스로 자랑하려니 민망하네요. 굳이 말한다면 40여년 공직 생활에서 가장 기억나는 것은 부가가치세 도입으로 IMF 회원국에서 최고의 재정건전성을 확립한 것, 그리고 미국 월스트리트에 채권발행을 함으로써 꿈의 한 자릿수 금리의 교두보를 마련한 일, 세계 어느 나라도 하지 않는 연구 인력비에 대한 25% 세액공제제도를 시행해 우리가 연구개발(R&D) 투자 1위가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후회스러운 일은 종부세를 완화만 하고 폐지하지 못한 것, 금융감독청을 미루다 설립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마음 아픈 일은 금융실명제가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개인의 계좌 정보가 보호받지 못하고 전직 대통령 등 많은 지도급 인사가 과도한 수사를 당하는 것을 볼 때 마음이 아팠습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선제적(preemptive), 결정적(decisive), 충분한(sufficient) 전략을 추진하여 일곱 가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성장회복, 7위 수출대국, 1위 R&D 투자국, 자본수출국 전환, 아시아 최고 신용등급, G20 정상회의 의장국으로 룰 메이커 국가, 수원국에서 원조국 전환 등입니다.
4년 만에 졸업한 경남고에서 사는 동안 필요한 지혜와 용기 배워
북 콘서트에 많은 동문 참석하고 격려해줘 너무나 감사하게 생각
조국에 대한 ‘최후 봉사’하는 마음으로 소설 ‘최후진술’ 연재할 것
△ 북 콘서트 때 동문들이 많이 찾아와 강연을 들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지난 8월 13일 프레스센터에서 ‘현장에서 본 한국 경제 도전실록’ 북콘서트를 열게 된 것은 공직자가 공직에서 얻은 경험은 세금으로 얻은 공공재이기 때문에 후진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맞다는 언론인들의 권유에 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언론인과 후배 공직자들 특히 실무 과장 중심으로 북콘서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언론인 중심 100명을 대상으로 한 북콘서트였는데 동문들이 많이 나와 마지막에 동문끼리 기념촬영도 하였습니다. 특히 최범수(29회) 재경동창회장께서 와 주시어 크게 기뻤습니다. 부산에서도 10월 14일 파이낸셜뉴스와 부산상공회의소 주관으로 북콘서트를 합니다. 부산의 기업인과 동문들에게 오늘의 우리 경제가 있기까지의 도전의 기록들을 나누고 지금의 세계경제에 대한 견해를 나누는 자리가 될 것 같습니다.
△ 내년 팔순을 맞습니다. 지난 세월에 대해 회고해 보신다면 어떤 삶이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인류사에 두 기적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2,000년간 나라를 잃고 유리하다가 나라를 재건한 이스라엘이고 다른 하나는 한 세대 만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한국이라는 것입니다. 해방둥이로 태어나 아프리카보다 가난했던 최빈국에서 개도국을 거쳐 선진국 문턱을 넘어 살면서, 다른 나라에서 100년 이상에 걸쳐 일어난 일들을 모두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해방과 건국의 환희가 가시기도 전에 일어난 6・25전쟁으로 초토화된 나라를 복구하고, 한 세대 만에 산업화와 민주화의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기회로 삼아 세계 7위 수출대국으로 우뚝 서고 G20 의장국으로 룰 메이커의 대열에 섰을 때 감개무량했습니다. 100여 년 전 고래 싸움에 등이 터졌던 우리는 지금 작지만 영리한 돌고래가 되었다는 것을 잊지 못합니다.
살다보니 오르막도 있었고 내리막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구름에 달 가듯이 산 10년 야인시절이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는 생각도 듭니다. 마지막에는 스스로 0.001%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시대의 아픔을 겪으며 가진 것은 모두 빼앗겼습니다. 살고 있는 집과 자동차는 남아 그것을 감사했습니다.
△ 지금까지의 이력을 보면 정말 많은 활동을 하셨습니다. 소설가로 등단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작가가 되기 위해 소설을 쓰게 된 것은 아닙니다.
돈 한 푼 챙긴 것도 없이 아픔을 당하는 감옥에서 이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어 그 많은 시간에 글을 쓰게 되었는데 그것이 소설이 되었습니다. 다큐멘터리로 쓰면 그들 ‘조물주’들에게 무슨 화를 또 당할는지 걱정하는 사람들의 뜻을 따라 소설로 쓰게 되었습니다. 소설이야 문제 삼지 않겠지라는 생각에서요. 이번 10월에 재창간되는 ‘문학사상’에 감옥에서 쓴 중편 소설 ‘최후진술’을 연재합니다. 조국에 대한 ‘최후 봉사’로 민중의 광장에 올립니다. 우리 동문 출신 대법원장이 구속되자 그렇게 부른 ‘조물주’의 세상은, 있는 법은 없이 하고 없는 법은 있게 하는, 그들의 초능력을 민중은 모릅니다. 문명 이전의 세상에서나 있을
시대의 아픔이 다시는 우리들과 후손들에게 없었으면 좋겠다는 오지랖에 돌팔매 맞을 각오를 하고 광장에 나선 것입니다.
△ 장관님의 일생에 경남고는 어떤 의미를 지닌 학교인지 말씀해주십시오.
저는 경남고를 4년 만에 졸업했습니다. 어쩌면 그 4년이 제가 사는 동안 필요한 지혜의 대부분을 배웠습니다. 제가 인생 최초의 시련과 도전과 좌절과 극복을 하는 과정에서 인생이라는 것이 이렇겠구나를 처음 배우게 된 시기였습니다. 지식도 사는 동안 필요한 것의 대부분을 경남고 시절에 배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고등학교 때 항상 가정교사를 구해 주어 공부하게 하고 고3 때는 10월에 맹장 수술로 부산에 있기 힘들 때 고향에 내려가 학교에 못 나갔는데, 졸업시험도 지난 평균 성적으로 하여 주시고 서울법대 원서도 대신 써 주신 김영신 선생님이 없었으면 오늘의 저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3 가정교사 집의 주인어른께서 자기 자식을 가르치지 않아도 가정교사를 하면서 서울법대에 들어가는 것이 큰 교육이라고 하시면서 저를 아들같이 키워 주신 변해관 양아버지가 없었다면 또 오늘의 저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추석 전 천안공원에 변해관 아버지에게는 성묘를 하였지만 김영신 선생님에게는 그러지 못해 죄를 지은 마음이 큽니다.
△ 고등학교 때 소설을 쓴다며 휴학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학창 시절 꿈이 궁금합니다.
소설을 쓴다고 휴학한 것은 하늘과 땅이 맞붙어 숨쉴 공간이 없을 때의 절규였고 탈출구였습니다. 가정 교사를 하다가 나오고를 거듭하다가 잠잘 공간도 없는 저에게 부산은 호흡할 공기마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미국의 존 스타인벡이 중졸로 노벨상을 받게 되었다는 잘못된 보도를 보고 경남고 2년 중퇴면 학벌에 문제는 없겠다 싶어 한번 도망가 본 것입니다. 뒤에 스타인벡은 대학 중퇴라는 것을 알고 웃었지요. 삶이란 신기루를 따라 가기도 한다는 것을.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소설을 써 보니 아무리 해도 소설에 자질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는 “공부가 소설보다 쉽다”는 김영신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원래의 길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서울법대를 가고 공직자의 길을 걷게됐습니다.
△ 만세 용마에 가입하는 등 동창회 활동에도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세 용마 가입 동기와 동창회 발전을 위해 조언 부탁드립니다.
경남고는 삶의 지혜와 공간을 처음으로 제공하였고, 주류 사회에 가담할 수 있는 관문이었습니다. 시골 합천에서 자라 경남고에 들어갔을 때 항상 비주류였지만 서울로 오면서 경고 주류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최근 책을 발간한 소식을 듣고 격려 전화를 해 주신 9회 김경희 선배님이 평생 아껴주시고 끌어주신 것이 주류 참여의 계기였습니다. 그 고마움의 표시로 동창회 일에 조금 참여했습니다. 남수단의 성자 이태석(35회) 신부 동문의 동상을 교정에 세우는 일에 참여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그런 동창회와 다르게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정부에서 일할 때 경고에 대한 잊을 수 없는 빚을 갚기 위해 경남고를 부활하는 정책을 세우고 추진도 했지만 제대로 되지를 않았습니다. 고교 평준화와 그린벨트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제도에 대한 반성은 여당 야당 모두 무관심이었으니까요. 어쩌면 두 가지 실책이 지금 후배들이 겪는 만병의 근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 후배들에 조언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감옥 까지 갔다가 온 사람이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평생을 바쳤지만 저를 버린 조국에 대해 하고 싶은 절규를 재창간되는 ‘문학사상’에 쓴 중편 소설 ‘최후진술’에 피를 토하듯 말하였습니다. 공직에 있는 후배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역사는 용기를 갖고 행동하는 사람에 의해 쓰여집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패기 없는 관료는 비판받을 일도 없지만 평가받을 일도 없습니다. 국민은 소신을 갖고 일하고 결과로 말하는 관료를 원합니다. 대중은 비판받을 때는 비판에 동참하지만 결과에도 동참합니다. 비판을 받고 물러난 관료는 나중에 평가를 남깁니다. 일하면 비판받습니다. 그것이 공직자의 숙명입니다.” 그리고 사
랑하는 동문들에게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후배 동문들 하는 일마다 성공하시고 노년의 선배님들 건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김경희 선배님 백세토록 건강하세요.